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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교회사

교황청의 분열 과정

by 델로노아 202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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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청의 분열 과정 정리 ]

 

13세기 접어들면서 중세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동방과 서방의 연합이 막을 내렸고, 새로운 경제적, 정치적 상황들이 교황 권위에 도전하였다.

 

- 인노센트3세 : 교황제도를 가장 강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 시기를 교황제의 황금기라고 부르며 그는 교황을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교황의 권위를 왕권위에 두었다. 이 시기는 교황권이 절정에 달했다.

 

<투쟁시기: 인노센트3세 이후>

-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들(3명 호노리우스3세, 그레고리9세, 인노센트4세)인노센트 4세)과의 투쟁은 38년 동안 진행되었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가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예루살렘 탈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교황 그레고리9세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했고, 항구를 떠난 원정대는 출발한 지 사흘 만에 전염병을 이유로 되돌아왔다. 이 일로 그레고리 9세는 황제를 파문했고, 두 번의 파문을 받은 프리드리히 2세는 제5차 십자군원정을 감행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묘교회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파문당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그레고리 9세의 유산으로 받은 땅의 문제로 프리드리히 2세와 격렬히 비난이 오고 갔으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그레고리 9세는 죽음을 맞이한다.

교황 인노센트 4세는 총력을 기울여 프리드리히 2세와 투쟁을 준비했다. 그는 리옹공의회를 개최하여 프리드리히 2세의 죄들을 공의회 앞에 낱낱이 공포했으며, 이단과 관련되어 있다고 언급했는데 이것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는 3명의 교황과 38년간 투쟁한 인물이었으며, 넘을 수 없었던 교황 절대주이에 도전한 인물이었다.

 

<평화시기>

이후 알렉산더 4-> 우르반4(최초의 프랑인 교황)-> 클레멘트 4세(사망이후 33년간 프랑스파와 이탈리아파의 권력투쟁 -> 그레고리10(그레고리 10세가 루돌프를 황제에 임명, 루돌프는 교황청을 만족시켰다.)

 

 

- 보니페이스 8: 인노센트 3세와 동일한 이념을 가졌던 교황이었으나 그의 시대에 교황권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보니페이스8세는 프랑스왕 필립 4세와의 싸움으로 세상을 떠났다.

둘의 싸움은 필립 4세가 영국과의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요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보니페이스 8세는 대칙서를 발표하여 성직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나 후에 말을 바꾸어 세금을 거둘 수 있다고 하였고, [우남상탐]문서를 발표하여 교황이 황제보다 우월하다는 교황수위권을 제시하였으나 필립 4세의 공격을 받아 후일 세상을 떠났다.

 

<교황청의 아비뇽 이전>

선거를 놓고 파벌 간의 싸움 끝에 프랑스의 클레멘트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궁을 마련했다.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혹은 아비뇽 유수로 이기간은 70여 년이었고 프랑스출신 7명의 교황이 제위 했다.

문제는 아비뇽 기간에 교황청이 극도로 타락했다. 마지막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로마로 돌아왔으나 사망하였고,

로마시민들의 폭동으로 나폴리 출신의 교황 우르반 6세가 선출되었다.

 

< 교황청 대분열>

우르반 6세는 교황청을 하나로 하려고 하였으나 프랑스 추기경들이 반대하였고, 클레멘스 7세를 아비뇽의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서방교회는 로마와 아비뇽에 2개의 교황청이 있었고, 2명의 교황이 39년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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