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케아 공의회(325년)
325년 로마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에 의하여 소집된 최초의 공의회이며, 삼위일체 문제를 다룬 회의이다.
이때 아리우스는 성부와 성자는 유사본질이라고 주장하며 이단사상을 드러냈고, 이를 물리친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의 비서로 참가했다가 아리우스에 맞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주장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사상을 물리쳤다. 이 회의에서 니케아신조가 만들어졌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믿음의 종교이지만 또한 지식을 중시하는 종교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지적이었으며, 사려 깊은 사람들이었으며, 자기들이 믿을 대상과 고백할 대상을 분명히 했다. 이런 지적인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문이 생겼는데, 그것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하는 소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의문이 재기되었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아직 교리가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라 혼합된 사상들과 이단들이 교회를 위협했고, 특히 예수와 관련된 삼위일체 논쟁이 처음부터 교회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런 사상은 A.D. 96년대 작품으로 판단되는 [헤르마스의 목자]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하나님이 영화롭고 위대한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또한 천상 무리들이 최고 지도자인 천사장 미가엘과 비슷한 ‘천상의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2세기 유대교에서 출현한 에비온파는 예수는 선택된 자이고 예언자라고 언급하였다. 이들 역시 예수를 ‘예언자’, ‘피조물’, ‘천사장’ 정도로 이해했다. 이 시대의 영지주의 교리 또한 교회를 위협하였는데, 영지주의 자들은 믿음이 아닌 ‘지식’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외쳤다. 이들은 영은 물질과 혼합되어 있어 물질의 노예가 되어있고, 영을 물질의 속박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구원이라고 주장했고, 영을 물질로부터 해방시키는 주체가 지식이며, 그 지식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아는 ‘비밀지식’이라고 하였다. 이들만이 구원에 관한 특별한 지식, 즉 ‘비밀지식’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주장했으며, 또한 이들은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원론 사상을 퍼트렸다. 이런 영지주의 사상에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한 신학자가 리용의 이레니우스였다. 그는 [이단논박]이라는 책을 통해 영지주의자를 비판하였다.
영지주의와 비슷한 사상의 2세기의 이단 마르시온은 구약성경을 부인하고 오직 누가 복음과 10권의 바울서신만을 인정하였고, 바울을 영웅시 하였다. 마르시온은 하나님을 두 하나님으로 이해했는데, 구약의 분노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으로 이해했다.
2세기에서 4세기 발생한 단일신론도 교회를 위협했다. 이 사상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예수는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동력적 단일신론이다. 그의 단일신론 사상은 사모사타의 바울에게 계승되었다. 다른 하나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으로 역시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가현설이었다. 대표적인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사벨리안주의이다. 사벨리안주의는 하나님께서 3가지 방법 또는 3가지 양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말한다. 즉 삼위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후 사벨리우스는 260년경 알렉사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와 달리 서방의 신학자 터툴리안은 하나님과 말씀(예수)를 동일본질로 보았다. 그는 “말씀만이 아버지를 알 수 있고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준다. 태초부터 알려진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아버지 안에 있는 말씀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하며, 아버지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 어떤것도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로마의 히폴리투스도 터툴리안의 사상과 비슷했다.
4세기에 이르러 이런 신앙적 의구심은 표면화 되었고 결국 콘스탄틴 황제 시대에 이르러 쟁점화 되었다. 문제의 주인공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였던 아리우스였는데, 그는 루시안의 사상과 오리겐의 종속적 로고스 사상을 결합하여 예수는 성부와 동일본질이 아니라 ‘유사본질’의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우스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는 극단적인 발언을 했다. 그는 “하나님은 성자 예수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라는 말을 하므로 예수가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었고, 결국 예수가 피조물이라는 극단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모든 주장은 비성경적이었다. 알렉산더 감독은 아리우스를 소환하여 메시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제국이 혼란스러워지자, 평화가 깨질 것을 걱정한 콘스탄틴 황제는 동방과 서방의 주교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것이 삼위일체 문제를 다룬 최초의 회의인 니케아공의회이다. 이 회의에서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지고,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니케아 공의회는
첫째, 최초의 연합공의회였다.
둘째, 니케아 공의회는 교회 문제에 대해 국가가 개입한 공의회였다.
셋째, 니케아 공의회는 교리 역사에서 중요한 교리들을 결정하였다.
1.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시다.
2.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다.
3.그리스도는 만들어지지 않고, 나셨다.
4.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셨다.
이로써 325년 제국의 동쪽 니케아에서 약 3개월 동안 진행된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님은 오리겐주의자나, 아리우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피조물이나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고,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심이 드러났다.
2.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종교회의로 1차는 381년 데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아리우스 이단논쟁을 종결짓기 위해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성부와 성자는 동일 본질이라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이 재확인되었으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만들어졌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죄된 아리우스는 유배생활을 했지만 자신들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황제는 제국 내의 모든 교회들과 함께 평화를 협력하겠다는 조건으로 아리우스의 복직을 허락했다. 이후 여러차례의 공의회를 통해 동방의 아리우스파들은 “동일본질”의 교리를 교묘하게 멀리했다. 콘스탄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정통 신앙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구속 운동은 아타나시우스를 통해 진전되었고, 그가 사망하자 갑바도기아 교부들에게 전달되어 계승케 하셨다.
콘스탄틴의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는 동방과 서방의 유일한 황제가 되며, 아리우스파들을 환대하고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많은 정통 감독들을 유배했다. 아타나시우스도 쫓겨나 이집트 사막에서 생활하며 아리우스파를 비판했다. 또 그의 통치시기에 급진적 성향의 아리우스 분파들이 발생되었는데, 이런 급진사상을 제공한 아에우스는 아리우스와는 달리 성경에는 관심이 없었고 철학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당시 아리우스 내부에는 이런 급진 성향의 분파들은 성자의 본질이 성부의 본질과 다르다는 “상이본질설”,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유사하다는 “유사본질설”, “본질”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성자가 성부와 유사하다는 “동류본질설”로 혼재했다.
결국 동방은 이런 교리들의 검증을 위해 회의를 소집하고 “동류본질설”이 제국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결정했다.
친-아리우스파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가 전사하자 이제 니케아 정통파들은 차기 황제인 쥴리안에게 기대했다. 황제가 된 쥴리안은 기독교인의 가면을 벗고 이교에 헌신한 인물로 돌변했다. 기독교를 배척하고 이교도 재건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는 또한 모든 형태에서 그리스 문화를 장려하였고 기독교인들을 교묘하게 차별하였다.
쥴리안의 통치 시기인 362년 아타나시우스는 유배생활에서 돌아왔으나 제국의 공식 종교로 동류본질설이 선포되었기에 공의회를 열고 문제들을 해결했다. 알렉산드리아 공의회는 유사본질설을 주장했던 앙키라의 바실과 화해를 했고, 성령론에 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는 점에서 중요한 회의였다. 이후 363년 안디옥 공의회에서도 유사본질파들이 니케아 신조를 옹호하므로 이들의 결속은 다시 확인 되었다. 인디옥 니케아 회의에서부터 정통신앙을 고수해 오던 아타나시우스는 다섯번째 유배생활을 마치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6년을 평안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한편 이 시기에 아폴리나리우스의 기독론이 논쟁이 되었다. 플라톤사상을 받아 가현설을 주장하며 예수는 단지 사람처럼 보일 뿐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교회를 더욱 혼란케 했다. 또한 이시기에 성령론에 대한 문제도 발생 되었다. 구체적으로 ‘성령의 지위’에 관한 문제였다. 이에 대해 “성령을 위해 싸우는 자들” 혹은 “마케도니우스파”들은 성령이 하나님도 피조물도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인해 아타나시우스는 성경의 증언을 통해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고 변호했다. 그러나 성령론에 해결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런 위기에서 다행히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구하고, 정통 신앙을 사수한 자들이 바로 세 명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이다. 특히 가이사랴의 바실은 [성령에 관해서]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본질이라고 주장했으며, 성령을 성경, 예배, 철학의 관점에서 생각했다. 나시안주의 그레고리도 그의 저서 [신학적 웅변]에서 성령을 언급했으며, 이 둘은 성부, 성자, 성령을 일치성 안에서의 구별을 강조했다. 이 시기 로마제국은 야만족의 침략을 받아 혼란에 빠졌고 서방에서는 니케아 신앙이 자리를 잡아갔다.
때를 같이하여 니케아주의자 데오도시우스가 동방의 황제로 등극하였으며, 정통신앙을 따르라는 소위 “데살로니가 칙령”을 공포하였다. 또한 그는 381년 1월 10일 “콘스탄티노플 칙령”을 반포하아 니케아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모두 이단으로 간주했다. 황제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였던 아리우스주의, 성령의 신성문제, 아포리나리우스주의를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는 아리우스파, 급진적인 아리우스파, 아폴리나리우스, 사벨리안주의, 마르셀리안, 성령을 위해 싸우는자, 폰타니안들 등을 모두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본질로 정의하였고, 성령을 ‘성령의 신성’과 삼위일체적 지위를 정립하였으며, 니케아 신앙을 재확인한 회의였다. 이렇게 아리우스로부터 시작된 삼위일체 논쟁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종결되었다. 56년 동안 진행된 삼위일체 논쟁의 최후 승자는 정통 진영이었다.
3. 에베소 공의회(431년)
앞선 두 공의회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성령도 하나님 되심이 결정되었다. 즉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였다. 기독론이 발생된 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간의 견채 차이에서 발생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말씀-육신" 기독론을 근거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했고, 안디옥 학파는 "말씀-인간" 기독론을 근거로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였다. 기독론의 논쟁을 일으킨 사람은 신성을 강조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아폴리나리우스였다. 그는 예수를 신성만 가진 존재로만 이해하려고 했다. 그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이후, 안디옥의 감독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청빙되었다. 그는 감독이 되자 마리아를 데오토고스( Θεοτόκος: '신성(神性) 출산'의 의미)라 부르지 말고 크리스토토코스(Χριστοτοκος: '그리스도 출산-인성출산'의 의미)로 불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데오토코스 사상을 거부하면 예수는 두 예수, 즉 신성을 가진 예수와 인성을 가진 예수가 되어 버린다. 이에 대해 시릴이 이의를 제기하자 에베소 공의회(431년)가 소집되었고 네스토리우스는 예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역사적으로 네스토리우스와 시릴 사이의 논쟁은 비단 교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교구 문제도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가 1등 교구로 격상되었고 알렉산드리아는 하위 교구로 강등되었다. 이로 인해 시리아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감독들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들에게 호의를 입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안디옥 학파 출신인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었고, 당연히 라이벌 관계인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은 기뻐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와 시릴 사이에는 신학적인 바탕도 달랐다. 서방학파의 경우, 다행이 터툴리안에 의해 교리가 정립되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은 한 위격 안에 연합되어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서방교회의 기독론은 동방지역인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시릴이 속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말씀-육신 기독론자로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였고, 인성과 신성의 연합 교회에서 ‘속성의 교류’ 교리를 믿었고, 마리아를 ‘데오토코스’(하나님을 낳은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들은 단성론으로 흐르고 말았다.
네스토리우스가 속한 안디옥 학파는 말씀-인간 기독론자로서의 예수의 두본성(두 본성파)을 말하면서도 특히 인성을 강조했으며, 신성과 인성을 너무 구별하려고 했다. 이들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만약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고 부른다면 신성과 인성이 연합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철저하게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주장했고, 이런 논리는 타인들에게 예수는 구별된 “두 인격” 또는 “두 예수”로 이해되었다. 또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설명해야만 했는데, 만약 연합 교리를 인정하게 되면 예수가 한분이 되고, 그 결과 인성과 신성의 구별이 사라지게 되므로 결합이라는 단어를 도입해야 했다. 결국 예수 안에 “두 인격” 또는 “두 예수”가 존재한다로 도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안디옥 학파는 연합을 결합이라는 의미로 대체하였지만 결국에는 예수를 신성을 지닌 사람과 인성을 지닌 두 예수로 표현하고야 말았다.
한편 이러한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시릴이었다. 이로써 이들은 역사상 보기 드문 신학 논쟁에 돌입했다. 시릴은 네스토리우스에게 데오토코스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두 번째 편지에선 자신의 견해와 네스토리우스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 일부가 칼케돈 신조에 합병되었다는 점이다. 이 편지가 중요한 것은 시릴이 세 번째 보낸 편지에는 안디옥 기독론의 특징들을 아주 단호하게 정죄하였다. 시릴은 네스토리우스가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으로 ‘결합’된 것으로 가르쳤지만 이것은 본성의 통일을 이루기에 충분치 않으며, 또한 일체성을 표현하기에도 충분치 않다고 했다.
시릴은 공의회를 준비했다. 431년 6월 22일 에베소에 있는 마리아 교회당에서 역사적인 에베소 회의를 개최하였고, 197명의 감독들은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에베소 공의회는 431년 10월 종결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네스토리우스는 추방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안에 두 개의 인격이 있음을 주장했다. 연합에 대해서도 네스토리우스는 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 연합하여 상호간의 구분이 없어져 버릴 것을 염려하여 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그리고 서방 신학자, 심지어 온건한 안디옥 신학자들까지 다 인정했던 속성의 교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것을 근거로 하여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했다. 이로 볼 때 교리 면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자임이 분명하다 그가 이단자인 것은 무엇보다도 두 예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 역시 [기독교 강요]에서 네스토리우스는 확실히 두 예수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고 밝혔다. 살펴보았듯이 네스토리우스는 정치적인 힘에 의해 정죄된 자가 아니라, 신학적 오류로 인해 처벌받은 이단자였다.
4. 칼케돈 공의회 (451년)
단성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51년 칼케돈에서 열렸던 공의회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되지 않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긴 논쟁은 끝이 났지만 여전히 교리적인 문제는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시릴에게 교리적인 약점이 별견되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신성이 인성을 흡수했다고 하는 아폴리나리우스적인 사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인성이 없고 신성이 있는 예수를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시릴의 알렉산드리아 진영은 예수의 인성을 시인했다. 이런 사상은 마치 신성이 인성을 흡수한 것으로 보여, 인성을 거부한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과 흡사했던 것이다. 이런 논리를 네스토리우스는 비판했다. 이렇게 양측이 대립되고 사태가 어렵게 진행되기 시작하였고, 이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협상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진영의 안디옥의 요한이 네스토리우스를 파면하는데, 이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여기엔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의 개입이 있었고, 그를 포기함으로 시릴도 제안을 받아들여 일종의 합의안이었던 [재 연합신조]를 433년에 제시하였다. 이 신조는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두 전통을 하나로 결합시킨 일종의 ‘평화안’이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들의 평화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것은 시릴의 후계자 디오스크루스로부터 발생되었다. 그는 야심이 넘친 인물로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동방전체의 수장 교구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인물이었다. 이렇게 알렉산드리아 측은 시릴, 디오스크루스, 콘스탄티노플의 유티케스로 연결되었고, 여기에 황제의 궁내 대신 크리사피우스가 개입하여 힘 있는 개파를 형성하였다. 여전히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연합 이후의 한 본성 교리를 주장하였고, 안디옥 학파 역시 두 본성 교리를 계속적으로 고집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유티케스는 “단성론”사상을 주장했다. 유티스케의 한 본성 교리는 알렉산드리아 전통이었고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에대해 447년 안디옥의 사이러스의 데오도레트는 자신의 책을 통해 유티케스가 주장한 교리가 가현설, 영지주의, 폴리나리우스 주의라고 비난했다. 여기에 유세비우스도 유티케스를 고발하자 회의 소집은 불가피했고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지방 감독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유티케스는 두 본성을 끝까지 거절하였고, 디오스크루스의 배신으로 파문 당한다. 그러나 유티케스를 배신한 시릴의 후계자 디오스크루스는 공회의를 개최하고 안디옥 진영을 제가하고, 자신이 정죄한 유티케스를 복직시키려고 했다. 이것이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의 도움으로 449년에 열린 [에베소 강도회의]이다. 이 사건으로 교황 레오 1세는 항의문을 황제와 그의 누이 필체리아에게 보냈으며 새로운 회의를 소집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칼케톤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모두 18회 동안 열렸는데 1-6회는 교리적인 문제, 7-18회 까지는 교회의 법적문제들을 다루었다.
칼케돈 공의회는 논란이 되어 왔던 네스토리우스주의, 그리고 유티케스주의 단성론문제 등을 해결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니케아 신앙을 재확인 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 사이에 오래 동안 논란이 되어 온 데오토코스 문제도 확정지었다. 비로소 양대 학파가 그토록 오래토록 논쟁했던 기독론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무엇보다 칼케돈 신조를 작성할 때 감독들은 [시릴이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플라비안의 고백문], [레오의 교서] 등을 이용했다. 레오의 교서는 터툴리안 이래로 서방교회의 전통으로 내려온 기독론이었다.
칼케톤 신조는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안디옥 신학을 동시에 수용한 신조가 되었다. “한 분이신 하나님”과 4개의 부정어“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분할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라는 표현이 알렉산드리아의 주장인 반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과 레오의 교서 등은 안디옥의 주장이었다. 무엇보다 칼케돈 신조의 교리사적 의의는 ‘성육신의 신비’를 설명한 점인데 성육신은 둘이 한 인격체 안에 실제적이고 영속적으로 결합한 것이며 둘이 어느 한쪽에 내주하거나 일시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님을 선포함으로 성육신으로 인해 두 본성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여 가현설의 이단을 막았으며, 두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두 인격이 된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성도 막았다. 성육신의 결과는 신이다. 예수는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신 한 분의 인격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은 성육신의 결과로 비롯된 영원한 상태이다. 물론 칼케돈 신조가 기독론의 모든 문제를 완벽히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앙문제에 있어서 이성을 제거하고 신앙의 신비를 계속하게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다시 한 번 기독교 신학에서 성육신 사건은 인간 이성이 도달할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케돈 신조는 기독교 역사상 기독교가 기독교로 남을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성육신의 신비에 머물 때만 가능함을 제시한 신조가 되었다. 칼케돈 신조는 기독론의 본질적 요소를 밝혀주므로 고대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 되었고 이단을 분별하는 잣대가 되었다. 그 어떤 교회라도 하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면 이단이 되고 기독 교회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신학과 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지주의란 (0) | 2023.08.05 |
---|---|
신구약 중간기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요약 (0) | 2023.08.04 |
사도행전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누굴까? (0) | 2023.07.30 |
유대인 회당에 대해 (0) | 2023.07.29 |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 (0) | 2023.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