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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교회사

프랑크 왕국의 탄생, 성장, 그리고 멸망 과정

by 델로노아 2023.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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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게르만족으로 거처는 지금의 북부 프랑스 지역이었다. 지도자 클로비스는 지역 패권 전쟁을 통하여 독일의 남부지방과 서쪽 지방을 차지했다.

서로마 제국 지역으로 진출한 게르만족이 세운 나라 중 하나로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에게 멸망한다. 게르만족의 일파로 라인강 근처에 살고 있었던 게르만 부족들을 한데 묶어 프랑크족이라고 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현대 서유럽의 근간이 되는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오늘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는 국가이다.

지도자 클로비스가 아나타시우스 정통신앙으로 개종하므로 서 유럽 전체가 정통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계승국임을 서방 세계에서 인정받아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되었다.

 

성장
클로비스 황제 사후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은 732년 이베리아반도를 통해 서유럽으로 쳐들어온 이슬람의 공격을 막아내고(투르 전투) 왕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피핀 3세는 칠데릭 3세를 몰아내고 왕좌에 오르고 싶어 했고 서방교회는 롬바드족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프랑크 왕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로마 교황의 지지를 얻은 피핀은 751년 메로빙거 왕조의 왕 칠데릭 3세를 몰아내고 카를링거 왕조를 출범시켰으며 로마교황으로부터 합법적인 국가로 승인을 받은 답례로 롬바드족을 진압하였고 교황 자카리우스는 피핀 3세를 황제로 임명하였다. 피핀은 권력찬탈을 지지해 준 로마 교황에게 보답으로 롬바르드족을 공격해 빼앗을 땅을 선물했다. (피핀의 증여) 이는 왕권을 주거나 빼앗는 권한이 교황에게 주어지는 로마 교황령의 시초가 되었다.

피핀 3세 사망 후 두 아들인 카를로스(샤를)와 카를로망에게 제국이 상속되었는데 카를로망이 일찍 사망하므로 샤를이 왕좌에 올랐다.

샤를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강력한 군사로 영토를 확장하면서도 체계적인 행정제도를 도입해 정국을 안정시켰는가 하면, 안으로는 국가의 문화와 예술이 융성하도록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스페인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여 국경을 견고히 지켰고, 강력한 적군 색슨 족을 엘베 강 유역에서 완전히 제압했다.

왕좌에 앉아 영토 확장과 국내 정세 안정에 총력을 기울였던 샤를 이 놓치지 않았던 분야가 문화, 예술, 학문의 부흥이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서유럽지역은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 때문에 문화적으로 피폐했던 상태였다. 국운을 좌우하는 것이 강한 군사력과 넓은 영토만이 아니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졌던 샤를은 대대적인 문화부흥정책을 펴면서 서유럽에서 중세문화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이 시기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한다

샤를의 업적이 위대했기에 그 이름에 위대한’(magus)라는 별칭이 붙어 샤를마뉴 대제로 불리게 되었다.

샤를은 교육, 학문, 수도 학교, 수도원을 장려하고 고전을 연구하게 하였다.

 

멸망 과정
814년 샤를마뉴가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들인 루이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유능한 통치자는 아니었다. 루이 1세가 사망하자 세 형제는 첫째와 동생들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으며 오늘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탄생되는 베르덩조약(843)을 맺어 제국을 분할하기로 하였다.

동부와 서부 프랑크는 중부 프랑크를 침임 해 메르센 조약(870)을 맺고 땅을 나누어 갖으므로 중부 프랑크가 사라졌다. 동프랑크는 독일로 발전하여 오토 대제가 대관식을 통해 황제가 되므로 신성로마제국이 되었고 서부 프랑크는 카롤링거 왕조의 왕통이 계속되다 프랑스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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