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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교회사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 2

by 델로노아 2023.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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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3. 훔베르트 사건(1054)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비잔티움 교회) 간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표출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로마 교황청의 대표인 카도르 대주교와 동방교회의 총대주교 마이클 세롤라리우스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은 교회의 신학적, 정치적 차이를 심화시키고, 결국 동서 교회의 공식적인 분열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1) 동서 교회 간의 긴장

1043년 콘스탄티노플 총대 감독이 된 마이클 세롤라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로마 교구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동방교회를 서방 교황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서방교회에서는 교황을 교회의 유일한 최고 권위자로 인정하며, 교황은 전체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특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동방교회는 교회의 권위가 여러 총대주교에게 분배되어 있다고 보고,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서 교회 간의 신학적 차이, 즉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1에서 언급한 필리오케 논쟁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또한 성체의 이해와 해석에서의 차이도 갈등을 깊게 만들었다.

 

2) 훔베르트 사건의 전개

동-서방 교회의 분리는 동방 불가리아의 대감독 오크리다의 레오가 작성한 문서에서 시작되었다. 레오의 항의서는 서방 교회를 비난하는 문서였고, 서방교회의 성직자들은 평신도를 개혁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와 더불어 스투디움의 수도사 니케타스 스테타토스의 항의서도 함께 보냈는데, 서방교회가 필리오케를 믿는 이단 집단이며, 사제들의 결혼 금지는 자연의 보편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라 비난했다.

두 개의 항의서를 받은 서방 교황 레오 9세는 이 일을 정중히 해결하기 위해 3명의 특사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이 특사단에는 과격하고 비타협적인 성격을 지닌 추기경 훔베르트가 있었다. 예상대로 콘스탄티노플은 서방 교황 사절단에 대해 냉담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 감독 마이클 세롤라리우스는 서방교회를 비난하고 사절단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며칠 후, 화가 난 특사들은 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 콘스탄티노플 총대 감독 마이클 세롤라리우스에 대한 파문장을 제단에 올려놓고 총대 감독을 아리우스 주의자, 니콜라당, 마니교도와 같은 이단자로 규정하며 저주가 함께 있을 것을 선언했다.

동방교회도 4일 뒤, 같은 장소에서 총대 감독의 이름으로 교황 레오 9세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했다.

 

깊어지던 감정의 골은 1182년 동방 사람들이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던 상당수의 서방 사람들을 대량 학살함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4년 후, 총대 감독 마이클 셀롤라리우스가 세상을 떠났고, 양 교회의 지도자들은 꾸준히 교회의 통일을 희망했으나 제4차 십자군 전쟁이 콘스탄티노플 학살사건(1202년)으로 이어지자 동-서방 교회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서방교회의 십자군은 학살한 그 자리에 ‘콘스탄티노플 라틴제국’을 건설했다. 이 제국은 56년 동안 지속되다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족에 의해 정복되어 동방교회는 사라졌다. 이로써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동방교회는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고, 아름답던 성 소피아 교회는 반달 모양의 상징물이 걸린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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